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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건축가

오섬훈
2011-03-29
조회수 2735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 장세양

오 섬 훈

 

들어가는 말

장세양선생이 돌아가신지 올해 9월이면 15년이 되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로 장세양선생을 택한 것은 나의 건축적인 수업과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공간이라는 매력 있는 조직을 잘 지키고 발전시켜왔고, 또한 건축가개인의 건축적 능력과 잠재력에 대해서도 새삼 와 닿기 때문이다. 25년 가까운 공간시절동안에 장세양소장은 돌아가실 때 까지 줄곧 나의 보스였다. 나의 직장 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 보스라 생각된다. 독립해서 어반엑스 건축을 운영한지 6년째 접어드는 이 무렵 장선배의 발자취와 흔적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다.


 

처음만남

장세양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3학년 때인 졸업한 선배들과 학부생들과의 만남행사를 통해서 였다. 대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건축적인 계기를 가지고 만난 것은 3학년 과제였던 ‘초등학교’설계에 대한 크리틱을 받으려고 선배를 찾아 갔던 때 무렵이었다. 당시 선배는 공간건축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 초등학교에 대한 설계개념으로 ‘자궁’에 대한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의 애들의 지적인, 신체적인 상황과 6학년 때의 지적인, 신체적인 상황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환경적인변화는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여 10개월 지난 뒤에 애기로 태어나는 변화못지 않게 중요하고 크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금생각하면 너무 비유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만, 여하튼 당시에는 이러한 생각으로 건축적인 해결책을 내려고 하니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장세양선배를 찾게 된 첫 계기였다. 여러 가지 많은 설명을 해주신 것 같았는데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단지 AA스쿨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고 개념적인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신 것 같았다.나중에 공간에 입사한 후에 십여 년이 지난 뒤에 그때 초등학교 프로젝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트레이닝멘토로서,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공간에 입사했다. 당시에 군대를 가야하는 신분으로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다.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군대를 곧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입사는 승낙이 되었으나 신분은 약간 어중간했다. 해서 군대 해결될 때까지 신입사원 일년차의 대우를 받아야 했다. 아마 그때도 장선배가 아니었으면 입사가 취소됐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해서 나의 건축수업시절은 장선배 밑에서 시작되었다. 군대입대를 연기하기위해 진학한 대학원이라지만 선배와 동료들 눈치와 바쁜 일에 치여서 수업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많이 끙끙거렸는데, 당시 신군부의 광주 민중 항쟁으로 인해서 대학들이 휴업에 들어갔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러 가지로. 휴업 전에 딱 한번 서양건축사특론에 들어갔더니 출석을 하지 않아 출석부에 이름이 삭제됐었다. 아마 휴학사태가 아니었으면 학교도 제대로 못가고 여러 가지가 엉망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에서의 첫 프로젝이 진주박물관이었다. 진주 성안에 박물관을 지어 김시민장군의 임진왜란 때의 투쟁정신을 기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담당이었던 박병욱씨와 둘이 현장조사가서 봤던 진주성의 풍경이 생생하다. 논개가 일본장수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촉석루와 그 주변들, 크고 작은 누들과 북쪽 끝 무렵에 있던 사찰, 꼭 신발모양을 확대해 놓은 듯한 성의 지형적 윤곽과 높낮이의 차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성곽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전통적인 소도시에 강력한 유적의 자장을 지닌 진주성 그 자체는 그 당시에 굉장한 인상을 새겨주었다. 진주박물관설계는 장세양선배께는 좋은 기회임과 동시에 많은 부담감을 가졌던듯하다. 땅속에 묻었다가, 들어 올렸다가, 가람배치로 풀었다가…….참으로 많은 아이디어를 냈던 프로젝였다. 설계진행중에 대지의 위치까지 변경했을 정도였으니까. 첫일년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생각하면 진주성정비 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이 프로젝을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하지 못한 게 아쉬움을 넘어서 역사적 흔적을 소홀히 했다는 자책감을 주는 프로젝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는 이 프로젝이 갖는 의미와 장세양선배의 중압감같은 것이 나를 비롯한 스텝들에겐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았다. 학교시절에 설계를 열심히 했지만 프로페셔널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장실장님은 스텝들을 데리고 애기를 많이 하면서 프로젝 진행을 많이 했다. 많은 애기를 했으나 별로 정해진건 없고…….철야하면서 그려놓으면 그새 장실장님은 다른 안을 구상하고, 이러한 반복들이 여름휴가철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일,이년차들에겐 장실장님이 훌륭한 멘토로 역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대일 도제와 같은 수업이었으니까.

 

논리적사고-건축가의자질배양

이러한 작업방식은 서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된 것 같고, 또 자기 아이디어를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든지 물리치든지 해야 하니 자연스레 논리적인 무장력이 생기게 된 것 같았다. 가끔 점심 후나 저녁시간에 논쟁이 붙는다.‘’......만약에 해가 서쪽에서 뜨면, 우리밤낮은 어떨까, 아니면 ........“ 이런 식의 대화가 많이 오갔다. 당시 우리들은 (같은 팀에 박병욱씨 외에도 민경식, 이종호등이 있었다) 얘기를 한참한 후에 장실장님의 논리적인 말 빨에 거의 모두 당해내지를 못했다. 예를 든 것처럼 가정에 문제가있다고 자위하면서…….사실 그랬다.

우리가 건축 작업을 하는 과정에 논리적인 사고는 본인의 번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전개 발전해 내는 과정은 물론이고 건축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건축가는 갖추어야할 중요한 무기중의 하나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정확한 논리는 사고전개와 설득에 중요한 힘이 되어준다. 은연중에 논리적 사고가 몸에 배게 한 진행방식에 감사한다. 감성적인 아이디어가 논리적인 힘을 만나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근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파트형공장설계에 대한 현상설계가 있었다. 장세양소장께서 담당소장이 되고, 담당인 김효만실장을 도와 진행을 했다. 1986년 년말경이라 기억된다. 그냥 아파트는 들어 봤어도 아파트형공장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흔한 공장의 한 유형이 되었지만. 당시에 공장은 당연히 땅바닥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 즉 땅이 좁은 나라에서는 이미 있었던 타입이었다. 새로운 건축물 타입의 현상설계였으니 고민거리였다. 현상설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과 다른 아이디어의 생성은 본질중의 하나이다. 프로그램의 해석과 분양해야할 규모의 설정이 필요했다. 홍콩과 말레이시아의 아파트형공장에 대한 복사본 자료가 있었으나, 수용되어야할 업종이 다르고 우리네 공장의 현황이 달라서 큰 도움이 못되었다. 결국 스텝들은 공장들로 출근해서 현황조사들을 해서 기초자료를 만들어야했다. 인터뷰와 장비배치들, 원료뿐 아니라 완제품의 이동방법, 직원들의 작업여건 등이 첵크되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분양규모, 동선체계, 소요공간 등이 추정되었고, 좋은 결과로 이어져 김수근 없는 공간에 작은 활력이 된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본 문제라도 풀어내는 힘이 생긴 것은 이러한 논리적인 사고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공간수성과 파트너십

1986년 김수근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공간을 운영하면서 늘 입버릇처럼 우리들에게 한 얘기가 있다. 선생사후 3년간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소위 3년상을 연상케 하는 자세였다. 실제 얼마나 바꾸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김수근의 삶과 건축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가 일궈 논 공간을 잘 이어가겠다는 다짐의 또 다른 표현이리라 생각된다. 거인 김수근에 대한 압박감과 또 한편에서는 공간을 맡아서 이어간다는 자긍심등이 뒤섞여 있었으리라.

1980년대 후반에 승효상소장, 신승배소장이 나간 후 파트너십으로 운영하면서 공간의 변화를 꾀한다. 공간잡지도 영문을 병행하는 시도를 한다. 파트너십을 도입하면서 두 가지를 얻으려했다. 첫째는 좋은 건축가가 남아서 지속적으로 좋은 건축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했다. 그래서 좋은 사무실로서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또 하나는 경영의 전문화다. 그래서 파트너중의 한사람을 건축가가 아닌 경영전문가가 참여되도록 했다. 건축가는 건축을 잘하고 또 자금파트의 전문가가 운영을 맡아서 서로 밸런스를 맞춰 좋은 사무실로 유지되길 바랐던 거 같다. SOM을 벤치마킹해서 명실상부한 전문가들로 이뤄진 설계조직을 꿈꿨던 것 같다.

4명의 건축가와 한명의 경영전문가로 구성되어 운영하면서 일 년에 두 차례의 운영회의를 하면서 공간의 운영원칙과 파트너끼리의 이견 조율 등이 이뤄졌다. 실제 장세양외의 당시 파트너였던 정종영, 이상림, 민경식 소장, 박영호전무(경영파트너)는 각자 자기 사무실과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뛰었던 것 같다. 각자의 개성과 성향이 달라서 장점인 동시에 불협화음도 간간히 느껴졌다. 아마도 그 시스템이 지속되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조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신사옥을 매개로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는 건축가로서 건축 작업에 대한 의욕을 많이 보였다. 당신생각에 공간을 이어오고 살려 가는데 본인을 너무 많이 소진시켰다고 생각도하고, 파트너십도 안정기에 들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공간신사옥을 지으려는 때와 타이밍이 맞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 것으로 느껴진다. 김수근선생의 10주기 전시회에 공간신사옥을 발표하면서 장세양선생의 건축적 사고를 정리해서 발표한다.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로서 신사옥의 전체적인 개념을 정리한다.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이 신사옥의 건축적인 장치들이 형성되게 된 과정을 보자. 공간의 사옥으로서 설계되고 지어진 건물이 이 유리박스이전에 두 개가 더 있다. 바로 직전의 사옥은 파주에 있는 공릉사옥이고, 제일먼저 지어진 게 원서동 공간사옥이다. 이원서동 사옥도 구관과 신관으로 5년의 틈이 존재한다. 이시간의 갭에도 불구하고 구관과 신관은 맥락을 같이 하므로 건축적 관점에서는 한 사옥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듯하다. 그래서 세단계의 사옥이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세 개의 사옥은 재료나 공간을 보는 관점이나 그 바탕에 깔린 건축적 철학도 다 다르다. 내 생각에는 세 개의 사옥 중에 공릉 것은 공간적인 이슈나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념적으로는 네가티비즘이라는 아이디어가 등장했으나 완성도 있는 실천전략의 부족으로 더욱 시야에서 좀 멀어진듯하다. 원서동의 신사옥과 구사옥의 대비가 워낙 극명해서 둘 다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장세양 선생은 건축가로서 건축적 신념을 펴고 또 다른 변신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유리박스와 비원의 풍경을 오버랩시킨 당신의 스케치에서 보듯이 600년 시간의 자장 속에서 누적된 기억의 비물질을 유리라는 물질로서 드러낸 것이다. 전술했듯이 그의 비상한 머리와 특유의 논리력으로 이 유리박스를 매개로 뭔가를 이뤄냈을 것이리라 믿는 것이다. 그 이전에 보여줬던 프로젝에서의 진행방법과 개념적아이디어의 추출과정을 보면 더욱 그럴 것 같다.

공간의 선배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장세양선생도 전체적으로는 공간을 만드는데 우선순위가 주어져 있었고 그 공간의 속성은 김수근선생으로부터 도제적으로 몸에 체득되어온 범주 내에 있었다. 그러한 태도가 이 유리박스를 계기로 변화를 보였기 때문에 또 다른 가능성을 얘기한 것이다.<그림-1,2>

 

대지와 프로그램의 재해석

다시 돌아가서 이 유리박스 이전의 프로젝을 보자. 대지의 상황이나 제약조건들로부터 건축적 아이디어를 더 비중 있게 얻은 것이 제주도서라벌호텔이나 대구박물관, 진주박물관등이라면, 프로그램의 재해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강하게 받은 것은 분당차병원,대전두리예식장,벽제화장장등이 대표될 것이다. 그리고 벽산125빌딩이나 부산종합운동장은 건축적인 완성도나 다른 시도를 한 경우라여겨진다. 서라벌호텔의 경우는 제주도의 향토적 조형과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의 행태적분석이 뒷받침이 되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 있는 만자비치호텔처럼 다른 즐길 거리가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호텔에 머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프로그램이 조성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제주의 상황도 밤에는 갈 곳이 별로 없어 부대프로그램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예식장이나 화장장의 경우는 그 속성이나 프로그램행태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공간의 성격과 동선구조를 갖는 공간이 생겼다. 화장장의 경우 사자와 그리고 대차라는 시신운반도구의 통로, 조문자의 대기영역, 가족과 상주의 접근범위, 마지막 화장로에 이르기 까지,......그리고 화장된 뒤에 남는 뼈의 분골과 수습과정들. 대기자들과 상주와 분골된 사자와의 만남 등이 일련의 통로적이고 프로세스적인 공간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그림-3,4,5,6>

 


마무리

내가 건축가로서 건물을 설계하고 활동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의 한분으로, 그래서 좋아하는 건축가로 장세양 선생을 꼽은 이유는 들어가는 말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에게서 받은 건축적 사고나 비젼에 대한 것과 건축가로서 도달하고자한 것에 대한 집념과 공간을 일궈낸 것에서 그의 열정과 섬세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장세양선생의 건축적인 성과나 평가의 성격보다는 15,6년을 같이 일한 후배로서,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사람의 건축인의 시각으로 보고자했다. 원고에서 간간히 그에 대한 어쭙잖은 소견들이 드러날 때가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의 이해차원으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그는 늘 큰형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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